Text 2/They are

[전정국 빙의글] They are 03

큥큥 뛰어다녀 2017. 10. 26. 19:07



They are













우리 동네에 같은 학교 여자 애가 살고 있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보이는게 그 여자애 뿐이니까. 처음에는 되게 신기해(?) 보이길래 말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말을 걸면 너무 이상한 애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이 생각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꽤나 커져버려 자꾸만  생각이 났다. 어느 쪽으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네가 먼저 말 거는 것 밖엔 없지."




"아... 야, 혹시 또라이로 보이진 않냐? 갑자기 모르는 애가 와서 말 걸면."


"친구할려면 처음에는 모르는 사이거든. 야, 그리고 네가 그렇게 집 앞에서 많이 봤으면 그 여자애도 널 많이 봤겠지. 아예 모르는 사이는 아니잖아."


"나한테 관심이 없어서 못 봤을 수도 있잖아."



솔직히 말해서 내가 원래부터 이렇게 걱정이 많은 성격은 분명 아닌데, 이상하게 이 상황이면 그랬다. 도대체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 지도 몰랐고, 모든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물론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말도 안되는 말을 내가 먼저 건넸긴 하지만.



"아니면 김태형한테 물어봐. 걔 남자애 친구 중에 김태형이 유일한 것 같던데."


"둘이 혹시 사귀는 사이라서 근처에 아무도 없는 거 아니야? 빼박인데."


"근데 난 일단 너 죽이고 싶다. 지금 2시간이 넘도록 뭐하는 거냐. 이것도 안돼, 저것도 안돼. 그럼 그냥 포기해. 너한텐 그게 답인듯."



박지민의 말이 맞았다. 사소한 것부터 너무 걱정이 많아져 돌이킬 수 없게 돼버렸다. 박지민과 얘기를 하느라 시간이 좀 많이 지나가버려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저기 저 멀리서 쭈그려 앉아있는 교복 입은 뒷통수 하나가 보이길래 나도 모르게 마법처럼 그 쪽으로 발을 옮겼다. 많이 마셔보이진 않은데, 말투를 보아하니 술을 마신 건 분명했다. 



"어, 야옹아... 어디가?"



평소에도 이렇게 동물들이랑 대화를 하는 건가. 내가 뒤에 왔음에도 한참이나 있다가 뒤돌아 나를 올려다봤다. 한참이나 서로를 쳐다봤지만 결국 난 아무 말도 못 꺼냈다. 왠지 시간이 더 지나면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은 편안함도 동시에 들었다. 





***





평소보다 몇분 좀 늦게 나와서 혹시나 널 놓치면 어쩔까, 싶어서 조금 빨리 걷고 있는데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서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네 모습이 보였다. 나만 너한테 신경을 쓰고 있는 줄 알았는데, 멀리서 너 또한 날 계속 바라보고 있길래 왠지 모르는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 생각해도 내 입 밖으로 그런 말이 어떻게 나온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안 가고 뭘 그렇게 쳐다봐?"



내 한마디 덕분에 우리 둘 사이의 허물은 쉽게 벗어낼 수 있었다. 첫마디는 이렇게 쉽게(?) 건네긴 했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 않아보이겠지만 속으로는 정말 수만가지 생각을 다 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내야 할 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oo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 나에 대해 묻기에 바빴다. 




"와, 너 나한테 관심이 많나보네. 왜 이렇게 잘 알아?"




"맨날 보이는 게 너니까."



난 내가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잘 뱉어낼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넌 이런 내 말에 아무런 의심없이 그냥 받아드려주었다. 다행이다, 그냥 넘어가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데, 앞으로는 말하는 연습이라도 해와야겠다. oo 앞에서 이렇게 얘기를 들어주는 것도 정말 좋았지만, 나는 무엇보다 내 얘기도 해주고 싶었다.



"아직 종 안 쳤는데."


"...알거든? 나 원래 이때 나와. 너는?"


"10시에 나오면 애들 많아서."



사실 10시 전에 나와 본 적은 없다. 그냥 oo와 비슷해보이고 싶어서 대충 지어낸 말인데, 박지민이 10시까지 학교 앞 pc방에 방문만 해도 할인권을 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오늘만 일찍 나온 건데 우연히 oo를 마주칠 수 있었다. 박지민한테는 미안하지만 pc방은 들리지 못했다. 앞으로는 10시 전에 나와야겠네. 





***





수능 100일 남은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70일 정도 밖에 남지 않게 됐다. 거기에다가 오늘은 평가원이 내는 마지막 모의고사, 9월 모의고사 날이었다. oo는 수능에 딱히 목숨 걸지 않아서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6월과 마찬가지로 재수생들이 그녀의 반에 찾아와서 그런지 평소의 모의고사 보다는 많이 긴장이 되었다. 잘치자, 생각하고 국어 영역부터 탐구 영역까지 모든 시험을 마쳤다. 



"...이게 뭐야!"



답안지를 받자마자 가장 자신있는 영어와 탐구 영역을 매기고 그 다음 수학을 매기는데, 말도 안되는 15점이라는 점수가 나왔다. 오늘은 특히나 oo가 손에 꼽을 정도로 수학을 열심히 푼 날인데, 이과로써 이건 말도 안되는 점수였다. '15' 라는 숫자에 충격을 꽤나 먹은 모양인지, 남은 과목들은 매기지도 않고 그냥 터덜 터덜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한편, 티나지 않게 신발장 근처에서 oo를 기다리고 있던 정국은 oo가 계속 보이지 않자 걱정을 하며 휴대폰을 꺼내는데, 아직도 자신은 oo의 번호를 모르고 있다는 좌절에 빠져 한숨을 푹 쉬다가도 자신을 지나쳐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oo를 발견하였다. 바로 그쪽으로 뛰어가 그녀의 앞에 섰는데, 표정이 안 좋아 보이길래 인사를 하려고 하던 정국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무슨 일 있었어?"


"...아무 것도. 나 오늘 혼자 가고 싶은데."


"...왜?"



귀찮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정국은 이유를 알고 싶었다. oo가 저렇게 슬픈 표정을 왜 짓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에 혼자 가고 싶다고 한 oo의 뒤를 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 말 없다가 따라오는게 점점 느껴졌는 모양인지, 뒤로 휙 돌아본 oo는 정국을 잔뜩 노려보고는 다시 앞으로 돌아 걸어갔다.



"따라오지 말라니까!"


"...우리집도 이쪽이잖아."


"...흐앙, 몰라!! 너 싫어, 전정국!"



계속해서 자신을 따라오는 정국 때문에 화가 난 모양인지 oo는 다시 뒤를 휙 돌아서 이번에는 소리까지 질렀다. 이런 모습의 oo는 처음이라 정국은 당황했지만, 걱정돼서 라고 말하기에는 쪽팔려서 그냥 말도 안되는 이유를 대버렸다. 근데 정국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울음을 터뜨려버린 oo를 보고서 깜짝 놀란 정국은 oo와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바로 그녀에게 뛰어가 무슨 일이냐며 무릎을 구부려 그녀의 숙인 얼굴을 바라보려 애를 썼다.



"절로가...! 나 혼자 갈 거라고 말했어!"



무슨 일인지는 말해주지 않고, 자신을 달래주는 정국의 손을 대충 멀리 보내더니, 다시 거리를 두고 저리로 가라며 펑펑 울며 혼자 걸어가는 oo였다. 정국은 우는 oo를 혼자 보낼 수가 없어서 다시 oo에게로 뛰어가, 괜찮아? 하고 물으며 한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느 정도 울음이 그쳤는지, 더운 날씨와 울음 때문에 잔뜩 붉어진 눈가와 볼을 보니 정국은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꾹 참았다. 여기서 웃음이라도 터지면 다시 oo가 좀 전처럼 눈물을 흘릴 것 같아서.



"나 있잖아..."


"응."



처음에는 무슨 일이냐며 계속 물어봤던 정국인데, 계속 oo가 대답을 하지 않자 말하기 껄끄러운 일이구나 싶어 정국은 더이상 묻지 않았다. 정국에게는 15점을 말해도 될 것 같아, 있잖아... 하고 말문을 트는데, 너무도 사랑스럽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정국의 표정에 순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까먹을 뻔한 oo였다. 




"나 사실, 수학 15점 받았어."


"...어? 너 혹시 운 거..."


"응... 15점 보고 충격 받아서... 미안, 괜히 너한테 화풀이 했,"




"푸하하, 야, 흑, oo야, 너 진짜 귀엽다. 어쩌지? 아하하하핳."



물론 정국과 알게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이렇게 크게 웃는 정국은 처음봤다. 심지어 웃는 모습을 잘 보여주지도 않아서, 그냥 평소에 웃음이 별로 없는 아이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잘 웃다니. oo는 살짝 충격을 먹었다. 이렇게 잘 웃는 줄 알았으면 더 웃겨줄 걸(?)


결국 원상복귀로 돌아온 oo와 정국은 다시 사이 좋게 집으로 향했다. 정국에게 오늘 하루만에 못볼꼴을 다 보여준 것 같아 oo는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또 표정이 굳어지면 정국이 무슨 일 있냐며 걱정할 것 같아 싱글벙글 웃느라 광대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조심히 들어가."


"...바로 집 앞인데, 뭐. 고마워, 오늘도."


"응, 아 그리고 점수... 너무 신경 쓰지마. 다음에는 잘 치면 되지, 나랑 공부하자."


"너 공부 잘하잖아. 수준 떨어져서 같이 못할 걸..."


"그럼 내가 알려주면 되지. 너도 나한테 알려주고."



oo는 며칠 전에 정국이 한 말이 문득 생각났다. '네 옆에 있으니까 말이 잘 안 나오네, 다음부턴 연습해올게.' 지금 생각해보니 많이 연습한 것 같았다. 물론 연습을 한게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예전과는 달리 자신에게 말을 꽤나 많이 하는 것 같아 조금 전에 무뚝뚝했던 기분이 다시 풀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