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2/청량 (淸涼)

[전정국 빙의글] 청량 (淸涼) 01

큥큥 뛰어다녀 2019. 8. 14. 08:32

청량 (淸涼)

 

 

 

 

 

 

 

 

 

 

 

 

며칠 째 한파가 지속되는 바람에 추운 걸 질색하는 난 외출할 때마다 얼마나 옷을 껴입었는지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서 옷을 벗을 때면 옷이 수십벌도 더 나오곤 했다. 그러다 밤에 다음날 일기예보를 시청하는데, 내일 추위가 좀 누그러진다는 소식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겠다. 뭐 딱히 패션에 그렇게 큰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지만 매일 비슷한 옷을 돌려 입는 건 지겨울 만도 했다.

 

 

"정국아, 너 여자 소개 안 받을래?"

 

"형... 내가 여자 만날 시간이 어디있다고.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그냥. 너 너무 바쁘게 사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지. 여자친구 만나면서 좀 여유있게 지내라. 굳이 바쁘게 살 필요는 없잖아."

 

 

석진이 형은 항상 저 소리다. 방학에 그냥 놀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이렇게 열심히 알바도 하는 거고, 열심히 영어 공부도 하고 있는 건데. 다 미래의 나를 생각해서 하는 일이다. 도저히 이 일정에는 여자를 만날 시간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여자를 싫어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보는 눈이 까다로운 건 맞는 것 같기도...?

 

 

"알겠어...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한번 만나볼게."

 

"와, 네가 웬일이냐? 그러면 연락처 알려줄 테니까, 둘이 스케줄 잡아서 만나봐. 이 형이 네 눈 높이를 잘 알잖냐. 네 마음에 쏙 들 거야."

 

 

내 마음에 쏙 들 거라는 석진이 형과 같은 확신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형 안목을 믿기 때문에 상대는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 알바가 끝나자마자 형이 보내준 연락처를 저장해, ooo 라고 뜬 톡 프로필을 먼저 살폈다. 프로필 사진은 없었다. 뭐 딱히 얼굴 사진으로 해놓을 거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다. 보는 눈이 까다롭다고 한 건 외모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저 성격을 까다롭게 볼 뿐이지.

 

 

- 안녕하세요. 석진이 형 소개로 연락드립니다. 전정국이예요.

 

- 반가워요! 전 ooo 라고 해요.

 

 

답장은 빨랐다. 연락하는 것에 있어서 무슨 일이 없는 한 답이 느린 걸 싫어하는 나는 이 점은 만족스러웠다. 물론 실제로 만나보진 않았지만, 온라인 상에서 먼저 연락을 해보니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괜찮았다. 너무 시끄럽지도 않고, 분주하지도 않는 딱 내 스타일이었다.

 

 

 

 

***

 

 

 

 

"오빠, 부탁 좀 하자... 응? 제발 나 소개 시켜줘... 정국 씨."

 

"야, 걔 지금 알바하고 공부하느라고 바쁜데 여자 만날 생각 아예 없는 것 같더라."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말해보면 안 돼? 오빠, 내가 진짜 오빠가 좋아하는 뷔페 쏠게!"

 

 

우연히 석진 오빠가 누구랑 연락하고 있는 걸 슬쩍 보게 되었는데, 대화창에서 보이는 작은 프로필 사진의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 작은 화면에서 내 남자다, 라는 걸 알아버린 나는 당장 오빠의 휴대폰을 뺏어 사진을 한번 클릭하고서 큰 화면으로 감상했다. 어쩜 이렇게 잘 생겼지? 당장 오빠한테 소개 시켜달라고 했는데, 어림도 없는 소리란다... 

 

오늘 말고도 몇 번을 부탁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5번은 족히 말한듯. 물론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지만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석진 오빠한테도 계속 부탁하는 것에 한계가 있으니, 이것도 문제였다. 어쩌지, 하는 마음에 오빠의 연락 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왔다, 연락!

 

 

- 야, 소개 받는대. 정국이 내가 엄청 아끼는 동생이니까 너 잘해라.

 

- 아, 오빠!!! 완전 고마워. 내가 오빠한테도 잘할게!!

 

 

마지막이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정말로 될 줄이야! 정국 씨, 너무 고마워요!! 오빠가 내 연락처를 정국 씨한테 줬다고 하니깐 연락을 기다리면 되는 건가 싶어 하루종일 휴대폰만 붙잡고 있었다. 연락이 오면 바로 답을 해줘야지 싶어서. 얼마 기다리지 않았는데, '전정국' 이라고 돼있는 이름으로 톡이 왔다. 이불을 얼마나 차댔던지, 너무 기분이 좋았다. 

 

 

"아... 일요일, 일요일. 21일... 무조건 기억해. 아, 근데 정국 씨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지...?"

 

 

한때 김칫국을 너무 마셔서 석진 오빠한테 정국 씨랑 소개팅을 하게 되면 어떻게 옷을 입고 나가야 되냐며 물었던 적이 있다. 근데 석진 오빠도 정국 씨가 좋아하는 외모는 잘 모르겠다며 두손 두발 다 든 바람에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며칠 남아있어서 그냥 내일 생각하자 싶어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 뿌듯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

 

 

 

 

오늘은 20일. 내일은 대망의 소개팅 날! 그냥 새 옷을 사서 입고 갈까, 하는 마음에 츄리닝을 입은 채 무작정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뭐든지 예뻐보이는게 내 눈에 걸리면 다 사버리겠노라, 다짐을 하고서. 롱패딩에 넣어놓은 내 폰이 지잉- 지잉- 하고 울리기에 누구지, 하고 아무 생각 없이 폰을 꺼냈는데, 폰에 떡하니 '정국 씨' 하고 글자가 뜨니 나로선 너무 당황스러웠다. 설마 오늘 21일인가? 내가 날짜를 잘못 본 건가?

 

 

"아, 미친... 어떡하지, 받아?"

 

 

그래도 받아야겠지 싶어, 여보세요... 하고 개미 똥만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는데, 수화기 넘어로는 급해보이는 정국 씨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친, 목소리는 처음 듣는 건데, 너무 긴장되잖아... 혹시 전화상으로 터지는 내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너무 조마조마 했다.

 

 

-"oo 씨, 하아, 후... 어디예요? 나 많이 늦은 것 같은데... 지금 찾고 있는데 안 보여서요. 뭐 입고 있어요?"

 

"네? 아... 그, 저..."

 

 

왜 이렇게 말이 똑바로 안 나오는 거지? 하필 상대가 정국 씨인데다가, 오늘 날짜는 20일이 확실하고 우리가 만나기로 한 날짜는 21일이 확실하다. 그러면 정국 씨가 실수를 하신 거라, 당황해버린 내 입 밖으로는 똑바로 된 한국말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 xx시네마 앞이예요."

 

 

아, 모르겠다. 그냥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제와서 오늘 20일이예요, 라고 말하면 정국 씨가 민망할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나한테 미안해하는데 뭔가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지는 기분이었다. 아, 알겠어요. 그 쪽으로 갈 게요! 하고 다시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지자 맞은 편에 있는 가게 유리에 비춰진 내 패션이 눈에 들어왔다. 아뿔싸, 나 지금 츄리닝 입고 있잖아? ...ooo, 제 정신이야? 그냥 솔직하게 불었어야 됐어. 오늘은 20일이고, 우린 내일 만나기로 한 거라고...

 

 

-"oo 씨, 저 xx시네마 앞에 다 왔는,"

 

"어..! 아, 찾았어요..."

 

 

다 왔다는 정국 씨의 목소리가 들리자 심장은 더 빠르게 뛰어왔다. 정말 이러다가 몸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오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게 뛰었다. 어떡하지, 만 무한반복 하고 있는데 조금 떨어져 있어도 정국 씨라고 보이는 형체가 있기에, 나는 찾았다며 먼저 정국 씨한테 다가가 손가락으로 등을 쿡쿡- 약하게 찔렀다. ...아, 실망하겠지... 실망할 거야.

 

 

"아, 늦어서 미안해요. oo 씨... 추운데 많이 기다렸죠. 이거 들고 있어요."

 

 

분명 실망하겠지 싶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정국 씨가 돌아보자마자 바로 눈을 밑으로 깔아버리고 억지로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근데 정국 씨는 내 옷에 대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지, 춥지 않냐며 자기 코트에 있는 핫팩 하나를 나한테 건네며 손에 쥐어주었다. 

 

 

"미안해요. 알바가 평소보다 조금 늦게 끝났거든요... 미리 연락 드렸어야 했는데, 빨리 오면 될 것 같아서 그냥 말을 안했거든요."

 

"아... 그렇구나. 괜찮아요. 별로 안 기다렸어요... 근데 여긴 자주 오세요?"

 

 

"석진이 형이랑 몇 번 와봤어요. oo 씨도 분명 좋아하실 것 같아서 왔어요. 어떤 거 드실래요?"

 

"아, 저는 정국 씨랑 같은 거 먹을게요. 헤헤.."

 

 

나름 분위기 있는 파스타 집에 왔는데 하필 츄리닝을 입고 오다니... 자꾸만 내 옷이 신경 쓰였다. 부끄러워서 도저히 눈을 못 마주칠 것 같아 그냥 테이블에 시선을 박았다. 한동안 둘다 아무 말이 없다가, oo 씨 하고 갑자기 내 이름이 불리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정국 씨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헐, 어떡해. 너무 잘생겼잖아?!

 

 

"왜요...?"

 

"아, 제 눈을 계속 피하시는 것 같아서... 불러봤어요. 눈 마주치고 싶어서."

 

 

어쩜 하는 말마다 이렇게 사람 심장을 들었다놨다 하는 거지... 정국 씨는 내 심장을 노리고 온 큐피트가 분명하다고 판단을 내리자마자 식사들이 예쁘게 테이블 위에 세팅되었다. 정국 씨는 얼마나 매너가 좋던지, 앞접시를 들어 파스타와 리조또 적당량을 덜어 내 앞자리에 가져다주었다. 아, 이 남자 매너에 치일 것 같아...

 

 

"맛은 어때요? 괜찮아요?"

 

"네, 맛있어요!"

 

 

딱히 가리는 음식이 없던 지라 정국 씨가 고른 메뉴를 아주 맛나게 먹을 수 있었다. 근데 원래 맛있는 음식들이기도 했고, 이 음식점 자체가 원래 요리를 잘하는 곳 같았다. 그래서 정국 씨가 몇 번 와보셨다고 한 건가. 맛있는 음식들이 입 안에 들어가니 내 패션은 이제 안중에도 없는지, 헤헤-. 하고 바보 같은 웃음을 짓기에 바빴다.

 

식사를 다 마치고, 근처에서 하는 전시회를 보러 왔다. 사실 전시회 보는 걸 좋아해서 내가 발견하자마자 먼저 오자고 한 것도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야 내 옷차림이 다시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몇 작품을 보지도 않았는데, 옆에 있는 정국 씨에게, 저 꼴이 별로죠... 라며 자신 없는 모습을 보였다.

 

 

"왜요?"

 

"아... 아니, 그래도 처음 만난 사인데 이렇게 츄리닝 입고 왔잖아요...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에요. 뭘 입는 지는 oo 씨 자유죠. 그래도 난 예쁘게 보였는데요? oo 씨는 날 보러 온 건데, 제 마음에 든 거면 된 거 아니에요?"

 

 

어쩜 말을 이렇게도 예쁘게 하는지. 내가 안 반하고 베길 수가 있냐! 처음에는 아주 집중해서 전시회에 있는 작품들을 감상했지만, 뒤이어서는 그 작품을 감상하는 정국 씨라는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바빴다. 전시회장에서 나오니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빨리져 하늘이 벌써 어두껌껌하게 변해있었다. ...아, 아쉬워. 하루종일 정국 씨랑 같이 있고 싶다.

 

집까지 걸어가는데 일부러 천천히 걸었는 것도 있다. 그리고 아까 정국 씨가 전시회장에서 뚫어져라 작품을 감상하기에 좀 전부터 추위를 많이 타는 듯한 모습에 서둘러 따뜻한 캔커피를 사왔었다. 혹시 지금도 춥지 않을까 싶어, 정국 씨 하고 이름을 부른 뒤 패딩 주머니에 있는 캔커피 하나를 슬쩍 내밀었다.

 

 

"언제 샀어요?"

 

"아까 정국 씨 작품 보실 때... 오늘 많이 추워 보이시더라구요. 그래서 샀어요. 아까 저한테 핫팩 주셨는 보답으로... 아, 저기 벤치 바람 막아줘서 안 추워요. 저기 앉아서 마시고 가요, 우리."

 

"그래요."

 

 

사실 정국 씨랑 더 오래 있고 싶어서 밖에서 같이 마시자고 한 것도 있다. 헤헤-. 아, 근데 원래 우리 내일 만나기로 한 거니까 내일도 만나면 안 되는 건가... 아,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겠지. 그래도 떠보는 것도 안 되려나... 조용히 캔커피를 홀짝이는 정국 씨를 슬쩍 몰래 보다가 용기를 내서 먼저 말을 걸었다.

 

 

"정국 씨."

 

"네."

 

"혹시 내일은 시간 되세요?"

 

"내일... 월요일은 좀 늦을 텐데, oo 씨는 괜찮아요?"

 

"일요일은요?"

 

"오늘이 일요일... 아, 아니... oo 씨, 오늘 토요일인데요?"

 

 

알고 있어요, 이 귀여운 사람아! 내 말을 듣자마자 멘붕이 오는지 주머니에 있는 저의 휴대폰을 꺼내, 20일 토요일 이라는 걸 확인하고 얼마나 눈이 동그랗게 변하던지. 너무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었다. 그치만 깨물면 난 바로 경찰서행이겠지. 나는 그런 귀여운 정국 씨의 모습을 계속 구경하고 있었다.

 

 

"...아, 미안해요. 난 오늘이 일요일인 줄 알고... oo 씨 근데 어떻게 알고 밖에..."

 

"아, 사실... 내일 정국 씨 만날 때 입을 옷 사려고 나왔었거든요. 근데 정국 씨가 갑자기 전화와서... 어디냐고 물으시길래 당황스러워서 그냥 말해버렸어요. 갑작스럽긴 했지만 전 너무 좋았어요. ...덕분에 이런 모습을 첫만남에 정국 씨께 보여드린 건 너무 부끄럽긴 하지만..."

 

"미안해요... 그래도 아까 oo 씨 모습 예쁘다고 한 말은 진심이였어요. 지금도 변함 없이."

 

"...아, 고마워요..."

 

"그럼 우리 내일도 만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