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싸우고 싶어
나에게는 항상 싸우는 남사친 한명이 있다. 진짜 서로 못 죽여서 안달난 사이. 누가 들으면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말도 안되는 개 뼈다구 같은 소리를 해댈 지도 모르겠지만 절대로 좋아하는 건 아니다. 김남준이 날 좋아하는 거면 모를까, 나는 절대로 김남준이 싫다! 너무 싫어서 돌아버릴 지경이다.
나는 알람을 5개 정도 맞추지 않으면 학교 마칠 시간 쯤에 일어나기 때문에 나에게 알람은 생명수 같은 존재다. 아무튼 내가 열심히 꿀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맡에서 알람 소리가 들리길래 끌려고 봤더니 김남준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이것이 이 꼭두새벽부터 무슨 일인가 싶어서 짜증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는데, 완전 다급한 김남준의 목소리가 휴대폰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
-"야, 너 학교 안 오고 뭐해! 9시 반도 넘었다, 담임이 너 안 오냐고 그러셨어."
"...뭐?! 9시 반?!"
미쳤다, 좆됐다. 담임이 요즘 우리반에 지각생이 너무 많아서 이번주 부터 지각하면 야자 시간까지 학교 전체 청소를 시킬 것이라고 아주 협박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9시 반이라니! 나는 당장 김남준의 전화를 끊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씻을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잠옷을 벗고 교복만 입은 상태로 바로 집 밖으로 뛰쳐나와 전속력으로 집 앞에 있는 학교까지 뛰었다. 이럴 때는 학교가 집이랑 가까운게 좋다니ㄲ, 근데 왜 이렇게 세상이 어두운 것 같지? 9시 반이 이렇게 어둡던가.
미친 듯이 뛰어 교문을 통과하고 이제 조금은 여유롭게 교실까지 올라가려고 뛰는 속도를 낮췄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건 그저 내가 너무 늦게 등교를 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늘이 새벽처럼 너무 어둑어둑 하길래 뭔가 이상하다, 생각을 하고 있는 도중, 치마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어놨던 휴대폰에서 다시 진동이 울려댔다.
-"야, 어디?"
"교문 들어왔지. 야, 근데 하늘이 되게 어둡다. 아직 겨울 오려면 멀었는데, 지구 종말이 다가오는 건가."
-"푸흡, 야, 너 교문 들어왔다고? 지금 몇 신지 좀 볼래?"
"어? ㅇ, 야, 씨발, 김남준 개새끼야, 너 뒤질려고 환장했지? 그래, 씨발 9시 반이 존나 어둡다고 생각한 내가 존나 병신이지! 너 오늘 뒤졌다."
나는 정말 진지했다. 9시 반이 너무 어둡길래 지구 종말이 다가오는 건가 싶었다. 내 말을 듣자마자 김남준은 웃음이 빵 터지더니, 갑자기 시간을 보라고 했다. 얘가 미쳤나, 싶어서 전화를 스피커로 돌리고 휴대폰으로 시간을 보는데, 난 순간 내가 숫자를 잘못 보고 있는 줄 알았다. 4시 39분을 보자마자 나는 쥐고 있던 휴대폰을 바닥에 던져 버리려다 착한 생각을 했다.
일방적으로 내가 전화를 끊어버리고 어떻게 하면 김남준을 죽여버릴 수 있을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하며 집 쪽으로 다시 걸어왔다. 5시도 안된 새벽에 이렇게 걷고 있는 날 보자니 너무 불쌍해 보였지만 김남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씨발, 일단 김남준이 방에서 못 나오도록 테이프로 방을 막아버리고 가구들을 방 앞으로 다 밀어버릴까?
"와... 완전 환상적인 방법인걸?"
일단 우리집과 정말 가까운 김남준 집에 몰래 잠입했다. 이럴 때는 김남준이 동생인 김태형이랑 단둘이 산다는 게 감사했다. 일단 집에 잠입하자마자 김남준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마음 속으로 사과드렸다. 나는 김남준 방을 지나쳐 김태형 방으로 들어왔다.
"엥, 누나?!"
"야, 조용히 해. 너 나 좀 도와."
"...근데 누나 얼굴이,"
"닥치고 돕기나 해."
아, 네가 보기에도 내 얼굴 많이 심각했어? 하긴 씻지도 않고 일어난 그대로 교복만 입고 나온게 좀 그렇긴 했지? 나는 김태형과 함께 박스테이프를 가져와 몰래 몰래 방문에 둘러서 붙였고, 이걸로는 부족하다 싶어 거실에 있는 소파를 함께 들어 김남준 방 앞에 얌전히 내려두었다. 그리고 소파로도 만족스럽지 못해서, 주방에 있는 식탁까지 들어 소파 뒤에 내려놓았다.
"와... 누나 괴물 아니야? 힘이 완전 천하장사 급이네."
"칭찬으로 들을게. 수고했다, 이거 선물. 그리고 김남준이 꺼내달라고 해서 꺼내주는 순간, 너 10층에서 떨어지면 무슨 기분인지 체험하게 해줄거야."
김태형에게는 살인 충동이 담긴 협박과 치마 주머니에 있는 어제 먹다 남은 마이쮸 하나를 주고 나는 김 씨 집에서 떠났다. 아침부터, 아니 새벽부터 너무 스펙타클한 경험을 하게 해준 김남준 덕분에 나는 집에 와서 자지 않고 여유롭게 씻고 마구자비로 입었던 교복도 단정히 입을 수 있었다. 그래, 여유로운 건 참 고맙지만 시발, 아무리 생각해도 4시 반은 너무 했잖아! 벌써부터 나는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할 김남준이 너무나도 기대됐다. 아, 얼른 학교에 가고 싶은 걸?
***
정확히 6시 48분, 김남준에게 전화가 걸려왔는데 나는 잔뜩 비웃으며 전화를 씹었다. 그리고 7시 20분에 여유롭게 나와서 학교에 등교를 했다. 거의 1분에 한번 꼴로 걸려오는 김남준 전화에 귀찮아서 그냥 휴대폰을 꺼버릴까 생각하다가 어떤 반응일지 궁금해 웃음을 꾹 참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너 돌았지."
"...푸흡, 어? 뭐가? 왜 그래, 남준아?"
-"네가 뒤지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빨리 문 안 열어?"
"우리 남준이 아직 문 여는 법도 몰라? 누나가 가르쳐 줄게. 문은 말이지, 일단 문고리를 손으로 잡ㄱ,"
-"야! 그게 아니잖아! 너 문에 뭔짓하고 갔냐?"
아, 계속 입 밖으로 웃음이 나와서 미치겠다. 결국 김남준은 지각 칭호를 휙득했다. 아, 너무 고소해서 입에서 고소미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김남준이 지각 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김태형에게 문자를 보냈다.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 하고. 그리고서 고개를 들었는데, 들자마자 김남준의 감자도리 같은 얼굴이 내 눈 앞에 있어 뒤로 몸이 쏠렸는데, 순간 내가 앉고 있던 의자가 균형을 잃어 넘어질 뻔 했지만 김남준이 한손으로 의자를 탁- 잡아주어서 의자가 뒤로 넘어지지 않았다. 아, 씨발 죽는 줄 알았네.
"야... 너 왜 여기 있어? 너 어떻게 나왔냐?"
"석진이 형한테 도와달라고 했지. 야, 넌 어떻게 소파랑 식탁을 움직여 놓을 생각을 다 하냐? 너도 대단하다."
"마음 속으로 너희 부모님께 사과 드렸다? 근데 너 지각 축하. 야자 때까지 청소 인생이겠네, 우리 남준이?"
"근데 어쩌냐, 너도 같이 해야 할듯."
"...뭔 소리야."
"오늘 있었던 대참사 얘기를 담임께 해드리니까 담임이 너도 같이 청소하면 되겠다고 하셨어. 같이 수고하자, oo야."
아, 나는 왜 꽃미남 석진 오빠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사실 김남준에게는 형도 있고, 동생도 있었다. 물론 그 형인 석진 오빠는 그 둘과 따로 살긴 하지만. 복수를 꿈꾸고 있던 나에게 석진 오빠는 잊혀진 모양이었다. 아, 젠장...
***
"야, 너 일부러 나 약 올리려고 집 안 가는 거지? 맞지?"
"기다려줘도 지랄이야. 그럼 나 먼저 가고."
"응, 영원히 꺼져라. 내일부터는 내 눈 앞에 띄지 말고, 남준아."
보충 시간 때부터 우리의 청소 타임은 시작 되었다. 우리는 사이좋게 학교를 딱 반으로 나눠서 청소를 하기로 결정했다. 근데 김남준 이 새끼가 먼저 청소를 끝냈다는게 문제지. 야자 시간까지 청소를 하고 있는데, 김남준 얘가 웬일로 날 기다려 준다고 하잖아. 난 순간 얘가 가장 무서워 보였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다고 하면 죽는 거라고 하던데.
"됐거든. 밖에 어두운데 누가 우리 돼지 잡아가면 어떡해."
"설마 그 우리 돼지는 나?"
"당연하지, 나한테 돼지는 너 밖에 없는데."
"응, 제발 꺼져, 남준아."
결국 김남준은 야자 시간동안 계속 되는 내 청소를 끝까지 기다려주었다. 음, 생각해보니까 고마운 것 같기도? 얘 없었으면 심심하게 혼자 청소할 뻔 했네. 같이 집에 걸어가고 있는 도중에, 김남준의 가방 끈을 손으로 쭉 잡아당겨 멈춰세웠다. 아, 씨발... 얘 얼굴을 보니까 고맙다는 말이 왜 쑥 들어가 버리지?
"왜."
"...뭐."
"네가 나 불렀잖아."
"...고맙다고,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말은 어색해서 잘 못하는데, 그냥 꾹 참고 해버렸다. 고마운 건 사실이니까. 아니, 근데 난 지각도 안 했는데 청소를 했으니까 솔직히 내가 고마워야 하는 건 아니잖아? 김남준만 아니었어도 난 청소 안 했을 텐데! 아, 근데 김남준이 지각한 건 나 때문이고... 근데 내가 이런 복수를 한 건 다 김남준이 새벽에 장난 전화를 한 바람에... 아, 됐다 됐어. 씨발, 그냥 이 세상에 태어난 내 잘못이지. (우울)
"얼른 들어가라. 내일 지각하지 말고."
"오냐."
평소와 같이 우리집까지 데려다주고 자기 집쪽으로 걸어가는 김남준이 오늘따라 좀 멋있어 보이긴 했다. 그래, 저 자식이 성격만 좀 죽이면 멋있긴 하지. 아니, 근데 내가 왜 이딴 거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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